영화 굿바이 크리스토퍼 로빈, 행복/미래는 사랑에 있다.(오디세우스) Goodbye Christopher Robin (2017) / 결말 해석 후기 리뷰

굿바이 크리스토퍼 로빈

Goodbye Christopher Robin (2017)

 

 

<<정보>>

‘마고 로비 Margot Robbie’ ‘도널 글리슨 Domhnall Gleeson’ 등이 출연하고 있다.


연출/기획 ‘사이먼 커티스 Simon Curtis’ 메가폰을 잡았다.

 

해외 7.2 평점, 총7.2백만 달러의 수입을 기록했다.

 

<<개인평가>>

 

행복/미래는 사랑에 있다.

 

1916년 1차 대전 후 전쟁트라우마에 놓여있던 앨런(도널 글리슨)은 자녀 빌리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위니 더 푸’ 책을 출간해 영국 내 가장 사랑받는 작가가 되나, 자녀는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는데, 영화는 이를 통해 ‘행복/미래는 사랑에 있다.’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내게 필요했던 건 아버지였어요.” 빌리의 언급, 엔딩서 “이제 집으로 가자.” 앨런의 언급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드러냈다 볼 수 있는 부분이다.

 

 

1.전쟁/명성(허영)/겨울=욕망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자녀=미래

 

샴페인 따는 소리, 풍선 터지는 소리, 벌레소리에 발작 증세를 일으켰던 것은 물론 좀처럼 글(감성=사랑)을 써내려가지 못했던 앨런, 여기서 소리에 의한 발작은 전쟁에 의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절망)이며, 글을 쓰지 못했다는 것은 감성=사랑을 잃었단 비유로써, 앨런은 전쟁(욕망만이 들끓는 지옥)이란 욕망에 물들게 되면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과거의 절망 속(아직 그 전쟁=지옥 속에 있다)에 머물러 있었다는 의미를 드러냈다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절망/지옥에 있던 앨런을 구원한 것은 누구였을까..?

 

사랑의 결실이자 미래를 상징하는 자녀 빌리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되면서, 소리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또 시대의 역작인 ‘위니 더 푸’까지 써낼 수 있었다는 것은, 절망에 빠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뿐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나, 애석하게도 이 행복/미래는 오래가지 못했다. 왜였을까..?

 

소설의 성공으로 앨런부부는 명성이란 허영(욕망)에 취함에 따라, 자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소설 속 허상의 이미지에 맞추며, 자녀의 소중한 시간들을 앗아갔기 때문으로, 이것이 갖는 의미는 부모가 바라본 욕망이 결국은 자신은 물론 미래인 자녀까지도 타락으로 이끌고 말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주변의 따돌림 속에 성장한 빌리가 보류 된 2차대전 참전을 희망했다는 것은, 부모의 욕망으로 현실이 절망(부모를 향한 뿌리 깊은 증오=욕망)=지옥과 다르지 않았단 반증이자, 허영=전쟁의 본질은 모두 나만을 생각하는 더러운 욕망에 기반한다는 의미를 강조했다 볼 수 있는 것, 즉 전쟁/욕망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는 의미를 드러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추운겨울 날의 발작증세에서, 추운겨울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욕망을 비유하는 것..(데메테르의 슬픔을 상징)

 

그렇다면 이들은 이 절망에서 벗어나 미래를 찾을 수 있었을까..?

 

 

2.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빌리8세->18세(10년)=오디세우스

 

참전 전 아들이 했던 언급을 곱씹으며 지난날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했던 앨런, 전장에서 돌아 온 빌리가 그런 부모를 용서(증오=욕망을 버리다)했다는 것은, 내면에 자리했던 욕망을 버리게 되면서 사랑을 찾게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 나만을 생각하는 욕망을 버린 뒤에야 내가 아닌 상대를 바라 볼 수 있는 사랑(희생/이해)을 찾았다는 것이고, 이 사랑을 통해 행복/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행복/미래는 욕망이 아닌 사랑에 있다는 강조가 된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앨런의 언급은, 이제야 내면의 안식처인 사랑을 찾았단 비유로, 이는 ‘오디세우스’의 여정과 닮아 있다.

 

그리스로마신화 속 포세이돈의 아들 퀴클롭스의 눈을 찔러 10년간 집에 돌아오지 못한 채 방황했던 오디세우스의 여정에서, 앨런이 바라본 명성(허영)은 오디세우스가 머물렀던 칼립소의 낙원(겉만 화려한, 빠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욕망)과 다르지 않는 것이며,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결과 10년 만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오디세우스는, 빌리가 8세에서 18세가 된 뒤에야 진정한 집을 찾게 된 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는 것, 마지막으로 오디세우스가 퀴클롭스의 눈을 찌른 뒤, “나는 아무것도 아닌자”라 했다는 것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삶은 아무것도 아닌 죽은 삶과 다르지 않단 강조가 된다 볼 수 있다. 이 같은 의미는 ‘미스터 노바디’에서도 잘 그려진다.

미스터 노바디(2009)

 

참고로 영화 중간 중간 18세가 된 빌리의 모습과 8세였던 빌리의 모습이 오버랩되던 것은, 부모의 욕망으로 자녀는 과거에 갇혀있단 비유이기도 하다.

 

 

연출, 배우

 

이 영화에서는 부모의 허영을 비추고 있으나, 대부분의 전쟁영화에서 전쟁을 배경으로, 남녀간의 삼각관계/그룹 간 증오를 그리고 있는 것은, 외부적인 절망이나 내면에 자리한 절망이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내면에 자리한 욕망이 겉으로 투영되어지는 것이 바로 전쟁이란 의미이다.

 

사랑/욕망에 대한 이해..

http://blog.naver.com/camoju/221109312288

 

-인물 리뷰

마고 로비   도널 글리슨   켈리 맥도날드   알렉스 로더   스티븐 캠벨 무어   제랄딘 소머빌   사이먼 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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