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2일 22 줄라이
22 July, 2018
<<정보>>
‘앤더스 다니엘슨 리 Anders Danielsen Lie’ ‘존 오이가르덴 Jon Oigarden’ 등이 출연하고 있다.
연출/각본/제작 ‘폴 그린그래스 Paul Greengrass’ 메가폰을 잡았다.
해외 6.7 평점, 제작비 2천만 달러가 투자되었다.
<<개인평가>>
두려움보다 강한 것은 사랑이다.
1차 노르웨이정부청사 폭탄테러(사망8명), 2차 우퇴위아 다문화청소년캠프학살(사망69명) 저지른 확신범 아네르스는 법정에서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려하는데..
“왜 아이들을 노렸나? -가장 아픈 부분을 망가트리려했다.” 아네르스의 언급, “혼자인 저자와 달리 저에겐 가족, 친구들, 꿈.. 있다.” 빌야르의 언급이 주제를 드러냈다 볼 수 있다.
1.아이=미래, 증오/테러/고립=욕망
정부청사테러로 행정부를 마비시킨 뒤, 다문화청소년캠프의 아이들을(미래) 학살한 아네르스는 자신의 행위가 다문화사회로 흘러가는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함이라 했으나, 과연 아네르스의 생각처럼 외부의 문을 걸어 잠그는 고립(내나라->내민족->나자신)이 미래였던 것일까..? 아이러니하게 아네르스의 모습에서 그 미래를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후 아비와는 단절, 함께하던 어미와도 대화 없이 지냈던 아네르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고립된(기댈 곳 없는 절망) 생활을 해오다, 편협함에(욕망) 사로잡혀 아이들을 죽인 괴물이(욕망의 노예) 되어간 것은, 아네리스의 생각과 달리 사회의 고립은 미래를 타락시킨단(괴물이 된 아네르스처럼)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네르스의 테러 후, 변호를 맡은 예이르를 비롯해 사회가 서로를 불신/증오(욕망)하게 된 것이 바로 아네르스가 바랐던 결과인 것, 즉 사람들은 테러란 두려움에(욕망) 굴복해 불신/증오에(고립=욕망) 빠져들었던 것이다.
벗어날 방법은..?
2.빌야르=미래
한쪽 눈을 잃고 신경을 다쳐 다리를 절었던 빌야르를 비롯해 많은 아이들과 사회는 친구/가족/연인(사랑)을 잃은 트라우마로(과거에 갇히다) 아네리스가 바랐던 절망에(현실증오) 빠져들었으나, 그런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게 되면서(사랑), 특히 자살까지 생각했던 빌야르가 가족/친구들의 응원에 목발을 집어던지며 홀로 일어선 뒤, 법정에 서서 아네르스와(두려움) 마주해다는 것은, 사랑으로 절망을(아네르스의 테러) 극복했다는 의미, 다시 말해 미래는 고립이(나만 생각한 아네르스) 아닌 사랑에 있단(서로를 의지한 빌야르/사회)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엔딩서 서로를 의지한 빌야르와 달리 의지할 사람이 없던 아네르스는 고립=절망에 놓였단 강조...
연출, 배우
영화는 보스턴테러를 액션으로 그린 ‘패트리어트 데이’보다 ‘스트롱거’처럼 심리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아네르스와 빌야르의 모습을 대비시킨 것은 확신범의 논리가 잘못되었음을 드러낸 것..
사랑/욕망
http://blog.naver.com/camoju/221109312288
-인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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